1950년대는 전쟁을 겪으면서 산업 기반의 대부분 무너졌다. 대부분의 산업 기반은 북한에 있었다. 남한은 얼마 되지 않은 기반마저 무너짐으로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하지만 음악은 항상 있었다. 1955년, 그러니까 전쟁이 끝난 후 2년 정도 밖에 지나지 않은 때에도 사람들은 음악을 즐겼고, 영화를 만들었다. 이 노래는 박시춘이 1955년 개봉된 <구원의 애정>에 삽입하기 우위하여 지은 곡이다. 영화 안에서 나애심이 불렀지만 후에 정식음반으로 출시될 때는 백설희가 부른다.
물새우는 강 언덕
손석우 작사, 박시춘 작곡, 백설희 노래 / 나애심 노래
[가사]
가사
물새 우는 고요한 강 언덕에
그대와 둘이서 부르는 사랑 노래
흘러가는 저 강물 가는 곳이 그 어데뇨
조각배에 사랑 싣고 행복 찾아 가자요
물새 우는 고요한 강 언덕에
그대와 둘이서 부르는 사랑 노래
흘러가는 저 강물 가는 곳이 그 어데뇨
조각배에 사랑 싣고 행복 찾아 가자요
물새 우는 고요한 강 언덕에
그대와 둘이서 부르는 사랑 노래
구원의 애정은 민경식 감독으로 1955년 5월 12일 개봉한 영화이다.
주연 윤일봉, 나애심, 추석양, 성소민
일봉과 애심은 연인 사이다. 하지만 갑가지 6.25 전쟁이 일어나 일봉은 입대를 하게 된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일봉의 전사통지서가 전해진다. 슬픔에 빠진 애심은 매일 일봉을 생각하며 함께 사랑을 속삭이던 강가를 찾아 배회하며 지낸다. 그러다 죽은 줄 알았던 일본이 다친 몸으로 강변에 나타난다. 둘은 서로 껴안고 기뻐하며 영화를 막을 내린다.
<푸른 언덕>은 1958년 현인이 센츄리 레코드를 통해 발표한 곡이다. 이 곡은 1948년 영화음악으로 제작된 것으로 다시 음반으로 발매한 곡이다. 현인이 영황도 출현하여 유명해진 노래다.
푸른 언덕
김영일 작사, 황문평 작곡, 현인
[가사]
물방아 개울가에 철쭉꽃이 피던 날
향내 어린 하늘가엔 옛 추억이 피었소
아지랑이 봄빛 타고 희망을 찾아
아득한 지평선엔 꿈이 어렸소
녹음 진 잔디 위에 파랑새가 울던 날
붉게 필 화원 속에 옛 사랑이 깃들었고
언덕 넘어 바람 타고 희망을 찾아
그리운 순정 속엔 꿈을 길렀고
영화<푸른 언덕>은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 영화라 할 수 있습니다. 현인이 주연을 맡아 시골에서 상경하여 톱 가수가 되어 시골에 정든 금녀와 결혼한다는 이야기다. 많은 인기를 얻었지만 순수한 사랑을 잃지 않는 당시의 사랑을 그리고 있다. 특이하게 개봉일은 1948년 8월 15일이다. 출연으로 현인, 김은희, 서월영, 김복자, 강석제가 있다. 감독은 유동일이다.
<카츄샤의 노래>는 1960년 송민도가 불러 히트한 곡이다. 첫사랑을 보낸 도련님을 떠나 보낸 후 그리움으로 살아가는 여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1970년대 김부자가 다시 불러 사랑을 받은 곡이다.
카츄샤의 노래
유호 작사, 이인권 작곡, 송민도 노래
[가사]
마음대로 사랑하고 마음대로 떠나가신
첫사랑 도련님과 정든 밤을 못 잊어
얼어붙은 마음속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오실 날을 기다리는 가엾어라 카추샤
찬바람은 내 가슴에 흰 눈은 쌓이는데
이별의 슬픔 안고 카츄샤는 흘러간다
진정으로 사랑하고 진정으로 보내드린
첫사랑 맺은 열매 웃기 전에 떠났네
내가 지은 죄이기에 끌려가고 끌려가도
죽기 전에 다시 한번 보고파라 카츄샤
찬바람은 내 가슴에 흰 눈은 쌓이는데
이별의 슬픔 안고 카츄샤는 흘러간다
카츄샤는 러시아 민요이다. 전쟁에 나가는 사랑하는 님을 그리워하며 소식을 전해 달라는 이야기는 담고 있다. 장고봉 전쟁과도 관련이 있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전쟁에 보낸 여인의 마음은 어떨까? 참으로 인고의 세월이 아닐 수 없다. 전쟁은 정말이지 일어나서는 안 될 최악의 일이다.
정훈희의 <안개>는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영화화 한 동명 영화의 주제곡이다. 첫앨범은 1967년에 발표되었다. 박해일과 탕웨가 주연을 맡은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의 주제곡으로 다시 불려졌다. 칠십이 넘은 나이에 아련한 목소리를 수많은 사람들을 조용히 눈물 흘리게 했다.
[가사]
나 홀로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 거리
그 언젠가 다정했던 그대의 그림자 하나
생각하면 무엇 하나 지나간 추억
그래도 애타게 그리는 마음
뚜루 뚜루루루 뚜룻뚜
뚜루 뚜루루루 뚜룻뚜
그 사람은 어디에 갔을까?
안개 속에 외로이 하염 없이 나는 간다
돌아서면 가로막는 낮은 목소리
바람이여 안개를 걷어가다오
뚜루 뚜루루루 뚜룻뚜
뚜루 뚜루루루 뚜룻뚜
그 사람은 어디에 갔을까?
안개 속에 눈을 떠라
눈물을 감추어라
정훈희는 친척과 가족이 대중가요와 깊은 연관이 있다. 부산에서 태어난 정훈희는 아버지 정근수는 피아니스트였고, 작은 아버지는 밴드 마스터, 큰 오빠 정희택은 기타리스트였다. 노래를 너무 좋아했던 정훈희는 여고 1학년 때 서울로 올라간다. 오빠의 소개로 서울 그랜드호텔에서 밤무대에서 일을 했다. 정훈희의 데뷔 앨범이기도 한 이 노래는 노래가 출시 되기 전 데모 앨범으로 각 방송사에 보내졌다. 라디오에서 한 번 듣고 수많은 청취자들의 요청이 쇄도하고 결국 몇 곡을 더 엊어 첫 앨범이 탄생한 것이다.
이번에 탕웨이가 출연한 <헤어질 결심>의 OST로 삽입되었다. 이렇게 보면 동일한 곡이 두 번이나 영화에 사용되었다. 흔하지 않는 일이다. 박찬욱 감독은 <헤어질 결심>을 정훈희의 <안개>를 들으며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노래를 위한 영화였던 것이다.
안개는 모호함 그 자체다. 처음 <무진기행>을 읽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서해안의 안개 낀 해변가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소설은 뭔가 모를 답답하지 않는 답답함에 빠져들게 한다.
1940년 1월 16일 동아일보 '당선 작곡'으로 발표된 곡이다. 동아일보사가 전국에 작곡노래를 모집한 대상인 셈이다. 실연의 아픔과 공허함을 담은 김안서의 시에 곡을 붙여 만든 곡이다. 당시 나운영의 나이는 고작 17세였다. 아무리 그 시대가 조속했다 하지만 그래도 정말 할 말을 잃게 만든다.
[가사]
끝없는 구름 길 어디를 향하고 그대는 가려나 가려나 가없는 바다의 외로운 배처럼 어디로 뜨려나 뜨려나 사랑의 스물은 덧없이 흐르고 앞길은 멀어라 멀어라 기쁨은 빠르고 설움은 끝없어 마음만이 아파라 아파라 아파라 아파라
지금은 애국가를 외우지 않기에 잘 모른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그 다음이 뭐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필자의 세대는 조회마다 불렀기 대문에 모를 수가 없다.
애국가 가사
1절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2절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 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3절 가을 하늘 공활한데 맑고 구름 없이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4절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날 사랑하세
안익태는 일제강점기 시절 애국가를 조선의 국격을 올렸다. 1905년 평양에서 태어나 일본에 건너가 도쿄 간다에 있던 세이소쿠 중학 2학년에 편입하고, 도쿄 고등음악학원에 들어가 첼로를 전공한다. 이후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유학 한다.
미국에 있을 때 동포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스코틀랜드 민요에 가사를 붙여 <애국가>를 부르는 것이 안타까워 직접 애국가를 만들기로 한다.
애국가의 전반부는 미국에 있을 때, 후반부는 유럽에 있을 때 완성하게 된다. 안익태의 <애국가>는 재미 동포를 중심으로 급속하게 퍼져 나갔다. 1936년 8월 베를린 올림픽 손기정 선수가 일본대표로 마라톤에 참여해 금메달을 목에 건다. 이때 함께 참석한 이들과 함께 애국가를 불렀다고 한다.
<가고파>로 유명한 김동진은 지금도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노래 <내 마음>을 작곡하기도 했다. 자신이 좋아하던 시를 곡을 붙였다. 조국을 사랑하는 이들에의해 점점 사랑을 받게 된 곡이다.
내 마음
김동명 시, 김동진 작곡
[가사]
그대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
내 마음을 촛불이요 그대 저 문을 닫아 주오 나는 그대의 비단 옷 자락에 떨며 고요히 최후의 한 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다
내 마음은 나그네요 그대 피리를 불어 주오 호젓이 나의 밤을 새이오리다
내 마음은 낙엽이요 잠간 그대의 뜰에 머무르게 하오 이제 바람이 일면 나는 또 나그네같이
외로이 그대를 떠나 가리다
은유와 상징이 가득한 이 노래는 자연의 풍경을 노래하고, 사랑하는 님과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을 담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뜻밖에도 이 노래는 독립운동가들의 심정을 표현한 노래하고 한다. 김동명이 독립투사들이 많았던 만주에 살면서 독립에 대한 투지와 식민인의 삶 등으로 살아갔다. 김동명의 시를 늘 마음에 담고 애송했다. 그는 이 시로 노래를 만들고 싶어했다. 하지만 악상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매일 산책하던 호숫가의 풍경을 담아 작곡한 것이다.
현제명 작시 작곡으로 알려진 <고향 생각>은 1923년 미국 유학 시절 고향을 그리워하며 작곡한 가곡이다. 1931년 <현제명 작곡집>에 수록되어 있다. 고향을 떠나 떠돌아야 했던 식민지 백성들의 아픔이 담겨 있다.
[가사]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 밝은 달만 쳐다보니 외롭기 한이 없다 내 동무 어데 두고 이 홀로 앉아서 이 일 저 일을 생각하니 눈물만 흐른다
고향 하늘 쳐다보니 별 떨기만 반짝거려 마음 없는 별을 보고 말 전해 무엇 하랴 저 달도 서쪽 산을 다 넘어 가건만 단잠 못 이뤄 애를 쓰니 이 밤을 어찌 해
-현제명 작시 작곡
요즘이야 언제든 가고 싶으면 갈 수 있는 고향이다. 근대화로 인해 이곳저곳을 떠도는 이들에게 고향은 어쩌면 낯설고 어색한 공간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라를 잃고 떠돌아야 한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밤이 깊어 외롭지만 돌아갈 수 없는 고향, 그리움만 가득하다. 현제명은 이 곡 외에도 많은 곡을 작곡했다.
<산들바람> 정인섭 시, 현제명 작곡
산들바람이 분다 산들 분다 달 밝은 가을밤에 달 밝은 가을밤에 산들바람 분다 아, 너도 가면 이 맘을 어이해 산들바람이 산들 분다 달 밝은 가을밤에 달 밝은 가을밤에 산들바람 분다 아, 꽃이지면
홍난파는 깨어 있는 음악가였다. <봉선화>가 많은 사랑을 받은 것을 확인한 홍난파는 더 많은 곡을 작곡하기 시작한다. 1922년 연악회를 창설하고 독립정신을 담은 노내를 작곡하는 데 힘을 썼다. 1925년 조선 최초의 음악 잡지 <음악계>을 만들어 음악 보급에 앞장섰다. 1929년에는 <조선 동요 100곡>을 출판한다. 1933년에는 이은상의 시조에서 15편을 골라 <조선 가요 작곡집>을 출파한다. <봄 처녀>는 <조선 가요 작곡집>에 들어가 있는 노래다.
[가사]
봄 처녀 제 오시네 새 풀 옷을 입으셨네
하얀 구름 너울 쓰고 진주 이슬 신으셨네
꽃다발 가슴에 안고 뉘를 찾아오시는고
님 찾아 가는 길에 내 집 앞을 지나시나
이상도 하오시다 행여 내게 오심인가
미안코 어리석은 양 나가 물어 볼까나
홍난파 <봄 처녀>
1933년 이은상의 시조 중에서 15편을 골라 홍난파가 작곡한 [조선 가요 작곡집] 안에 들어가 있는 곡이다. <봄 처녀> 외에도 , <사공의 노래> <성불사의 밤> 등이 있다.
학도가는 젊은 청년들에게 열심히 살도록 권하는 내용입니다.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개신교가 조선에 들어오면서 서양 음악도 함께 들어오게 됩니다. 선교사들은 초기에 의료 선교에 집중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조선사람들에게 신문물을 전하고, 근대교육을 시켰습니다. 초기 대부분의 학교가 교회나 미션스쿨이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학도야 학도야 청년 학도야
벽상의 괘종을 들어보시오
한 소리 두 소리 가고 못 오니
인생의 백 면 가기 주마 같도다
멜로디는 스코틀랜드 민요 <석별 Auld Lang Syne>를 그대로 가져와 가사만 바꾸어 불렀습니다. 이 멜로디로 수많은 노래들이 만들어 집니다. 교회의 주일학교에서 성경 목록가도 동일한 멜로디를 사용합니다. 동일한 멜로디로 <철도 창가>가 있습니다. 사실은 당시 대부분의 노래가 이 멜로디를 사용합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는 녹두장군으로 불린 전봉준의 동학혁명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노래입니다. 부패한 조선 말기의 정치 상황에서 백성들의 울분을 가득 안고 학명을 일으켰지만 관군과 합세한 일본군에 의해 처참하게 실패하고 맙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는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담은 노래입니다.
가사는 4절로 되어 있지만 많은 편곡들이 있어 각기 다른 가사를 사용하고 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 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수 울고 간다
조선말기 최제우는 무너져가는 조선을 보면서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동학을 창시합니다. 민중들이 함께 참여함으로 그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습니다. 그리고 1894년 드디어 대규모 봉기가 일어납니다.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를 가리지 않고 곳곳에서 일어납니다.
하지만 결국 관군과 일본의 개입으로 봉기를 실패로 돌아갑니다. 봉기를 이끌었던 전봉준은 끌려가 죽음을 당합니다. 키가 유난한 작았던 전봉준은 '녹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녹두 장군'으로 부릅니다.
녹두밭은 동학민을, 파랑새는 외세를(특히 일본), 청포 장수는 조선의 민중을 이야기 한다고 합니다. 트로트가 들어오기 전 우리나라 노래는 대부분이 6/8박자 또는 3/4박자였습니다. 이러한 음악 패턴은 흑인의 소울과 우리나라 한을 담은 담은 노래들이 있다고 합니다. 전문적인 음악을 용어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나중에 정확히 알면 다시 수정해 놓겠습니다.
본조 아리랑은 나운규가 아이랑을 소개한 것을 말합니다. 본조 아리랑을 본아이랑을 부르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나운규가 아리랑을 만들었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지만 그릇된 주장입니다. 나운규는 어느 날 지나 어떤 아줌마가 일을 하면서 흥얼거리는 것을 듣고 물어보니 아라랑이라고 해서 그것을 그대로 옮겨와 약간 수정한 것입니다. 본조아리랑 이전의 아리랑은 구조아이랑 또는 구아리랑이라고 부릅니다.
1896년 조선선에 아리랑을 발췌하여 보관한 헐버트 아리랑은 구조아리랑입니다. 아리랑은 매우 흡사하면서도 각 지역마다 가사와 흐름이 약간씩 다른 것이 특징입니다. 그러다보니 본조아리랑하여도 다양한 가사와 멜로디가 존재합니다. 이러한 개념 속에서 아리랑을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시간이 참 빠릅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시간은 흘러갑니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요? 농부는 변함없이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수확하기를 반복합니다. 그것이 농부의 본질이니까요.
농부는 압니다. 봄에 씨를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수 없다는 것을. 청춘의 때에 뿌리지 않으면 거둘 수 없습니다. 저는 오늘 블로그를 시작합니다.
많은 생각과 고민 끝에 블로그스팟에 터를 마련했습니다. 티스토리로 갈까 워드프레스로 갈까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 블로그스팟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이곳이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블로그를 조금 해 보신 분들은 알지만 블로그스팟은 색인이 느려도 너무 늦기 때문에 인고의 세월이 필요합니다. 거기에 이 블로그는 하위 도메인까지 씌워 언제 색인이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꼭 되리라는 확신이 있기에 이곳에 뿌리는 내립니다. 언젠가는 꼭...
이곳에 올려지는 내용은 대중가요의 가사와 사연, 뒷 이야기 등을 담을 생각입니다. 티스토리는 하루 15개 이상을 쓸 수 없기에 답답한 면도 있습니다.
이틀 전 공원에 산책을 나갔습니다. 늘 보던 풍경이었지만 그날 따라 유난히 공원 사이사이 서 있는 아름들이 소나무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나는 늘 떠돌아 다니는데 제들은 한 곳에 몇 백년을 버텨야 하니 얼마나 힘들까? 무슨 일이 일어나도 피하지도 못하고 한 곳에 있아야 하다니.
하지만 문득 드는 생각이, 한 곳에 뿌리를 내려야 나무는 자란다. 나무는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그렇구나. 한곳에 머무는 것은 그리 좋은 것은 아니지만 반대로 한곳에 머물지 않으면 뿌리를 내리지 못하니 자랄 수가 없구나.
대견스러웠습니다. 저들이 저렇게 자란 이유는 한 곳에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순간 뒷통수를 맞은 듯 번쩍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래 머물려야 한다. 아니 견뎌야 한다. 그것이 저의 생각이었습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블로그스팟이 사라지지 않고 오래오래 이곳에 머물러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오늘부터 이곳에 글쓰기를 시작합니다. 경험상 블로그스팟은 약 3개 정도 지나야 유입이 조금씩 일어나는 것 같네요. 하루에 최소 5개 이상 포스팅을 하면서 올 해안에 1200개 정도를 포스팅을 할 생각입니다. 길지 않은 글로 하나씩 적어 볼까 합니다. 많이 관심 가져 주시고 사랑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