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앨범은 1923년 발매된 것으로 <부모의 은덕가>와 <학도가> <권학가>가 들어가 있다. 흥미롭게 앨범에는 태극 무늬가 들어가 있다. 한국 최초의 앨범으로 만들어진 창가 형태의 노래이다. 1921년 앨범은 찾을 수 없고, 2913년경 재발매된 앨범은 이경호 소장이 소장하고 있다. 아래의 앨범도 이경호 소장의 것이다.
창가는 트로트가 생기기 직전 일본의 엔카와 서양의 음악들이 합성되어 만들어진 일종의 계몽가이다. 수많은 창가들이 있었지만 앨범으로 남겨진 최초의 창가는 이 앨범에 들어간 <학도가>이다. 노래는 개인이 아닌 합창 형식이며 이름은 '청년회원'으로 되어 있다. 초기의 창가는 대부분 교회에서 만들어졌다. <학도가>도 교회에서 불려진 노래로 보인다.
1940년 1월 16일 동아일보 '당선 작곡'으로 발표된 곡이다. 동아일보사가 전국에 작곡노래를 모집한 대상인 셈이다. 실연의 아픔과 공허함을 담은 김안서의 시에 곡을 붙여 만든 곡이다. 당시 나운영의 나이는 고작 17세였다. 아무리 그 시대가 조속했다 하지만 그래도 정말 할 말을 잃게 만든다.
[가사]
끝없는 구름 길 어디를 향하고 그대는 가려나 가려나 가없는 바다의 외로운 배처럼 어디로 뜨려나 뜨려나 사랑의 스물은 덧없이 흐르고 앞길은 멀어라 멀어라 기쁨은 빠르고 설움은 끝없어 마음만이 아파라 아파라 아파라 아파라
지금은 애국가를 외우지 않기에 잘 모른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그 다음이 뭐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필자의 세대는 조회마다 불렀기 대문에 모를 수가 없다.
애국가 가사
1절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2절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 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3절 가을 하늘 공활한데 맑고 구름 없이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4절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날 사랑하세
안익태는 일제강점기 시절 애국가를 조선의 국격을 올렸다. 1905년 평양에서 태어나 일본에 건너가 도쿄 간다에 있던 세이소쿠 중학 2학년에 편입하고, 도쿄 고등음악학원에 들어가 첼로를 전공한다. 이후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유학 한다.
미국에 있을 때 동포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스코틀랜드 민요에 가사를 붙여 <애국가>를 부르는 것이 안타까워 직접 애국가를 만들기로 한다.
애국가의 전반부는 미국에 있을 때, 후반부는 유럽에 있을 때 완성하게 된다. 안익태의 <애국가>는 재미 동포를 중심으로 급속하게 퍼져 나갔다. 1936년 8월 베를린 올림픽 손기정 선수가 일본대표로 마라톤에 참여해 금메달을 목에 건다. 이때 함께 참석한 이들과 함께 애국가를 불렀다고 한다.
<가고파>로 유명한 김동진은 지금도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노래 <내 마음>을 작곡하기도 했다. 자신이 좋아하던 시를 곡을 붙였다. 조국을 사랑하는 이들에의해 점점 사랑을 받게 된 곡이다.
내 마음
김동명 시, 김동진 작곡
[가사]
그대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
내 마음을 촛불이요 그대 저 문을 닫아 주오 나는 그대의 비단 옷 자락에 떨며 고요히 최후의 한 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다
내 마음은 나그네요 그대 피리를 불어 주오 호젓이 나의 밤을 새이오리다
내 마음은 낙엽이요 잠간 그대의 뜰에 머무르게 하오 이제 바람이 일면 나는 또 나그네같이
외로이 그대를 떠나 가리다
은유와 상징이 가득한 이 노래는 자연의 풍경을 노래하고, 사랑하는 님과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을 담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뜻밖에도 이 노래는 독립운동가들의 심정을 표현한 노래하고 한다. 김동명이 독립투사들이 많았던 만주에 살면서 독립에 대한 투지와 식민인의 삶 등으로 살아갔다. 김동명의 시를 늘 마음에 담고 애송했다. 그는 이 시로 노래를 만들고 싶어했다. 하지만 악상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매일 산책하던 호숫가의 풍경을 담아 작곡한 것이다.
현제명 작시 작곡으로 알려진 <고향 생각>은 1923년 미국 유학 시절 고향을 그리워하며 작곡한 가곡이다. 1931년 <현제명 작곡집>에 수록되어 있다. 고향을 떠나 떠돌아야 했던 식민지 백성들의 아픔이 담겨 있다.
[가사]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 밝은 달만 쳐다보니 외롭기 한이 없다 내 동무 어데 두고 이 홀로 앉아서 이 일 저 일을 생각하니 눈물만 흐른다
고향 하늘 쳐다보니 별 떨기만 반짝거려 마음 없는 별을 보고 말 전해 무엇 하랴 저 달도 서쪽 산을 다 넘어 가건만 단잠 못 이뤄 애를 쓰니 이 밤을 어찌 해
-현제명 작시 작곡
요즘이야 언제든 가고 싶으면 갈 수 있는 고향이다. 근대화로 인해 이곳저곳을 떠도는 이들에게 고향은 어쩌면 낯설고 어색한 공간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라를 잃고 떠돌아야 한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밤이 깊어 외롭지만 돌아갈 수 없는 고향, 그리움만 가득하다. 현제명은 이 곡 외에도 많은 곡을 작곡했다.
<산들바람> 정인섭 시, 현제명 작곡
산들바람이 분다 산들 분다 달 밝은 가을밤에 달 밝은 가을밤에 산들바람 분다 아, 너도 가면 이 맘을 어이해 산들바람이 산들 분다 달 밝은 가을밤에 달 밝은 가을밤에 산들바람 분다 아, 꽃이지면
홍난파는 깨어 있는 음악가였다. <봉선화>가 많은 사랑을 받은 것을 확인한 홍난파는 더 많은 곡을 작곡하기 시작한다. 1922년 연악회를 창설하고 독립정신을 담은 노내를 작곡하는 데 힘을 썼다. 1925년 조선 최초의 음악 잡지 <음악계>을 만들어 음악 보급에 앞장섰다. 1929년에는 <조선 동요 100곡>을 출판한다. 1933년에는 이은상의 시조에서 15편을 골라 <조선 가요 작곡집>을 출파한다. <봄 처녀>는 <조선 가요 작곡집>에 들어가 있는 노래다.
[가사]
봄 처녀 제 오시네 새 풀 옷을 입으셨네
하얀 구름 너울 쓰고 진주 이슬 신으셨네
꽃다발 가슴에 안고 뉘를 찾아오시는고
님 찾아 가는 길에 내 집 앞을 지나시나
이상도 하오시다 행여 내게 오심인가
미안코 어리석은 양 나가 물어 볼까나
홍난파 <봄 처녀>
1933년 이은상의 시조 중에서 15편을 골라 홍난파가 작곡한 [조선 가요 작곡집] 안에 들어가 있는 곡이다. <봄 처녀> 외에도 , <사공의 노래> <성불사의 밤> 등이 있다.
학도가는 젊은 청년들에게 열심히 살도록 권하는 내용입니다.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개신교가 조선에 들어오면서 서양 음악도 함께 들어오게 됩니다. 선교사들은 초기에 의료 선교에 집중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조선사람들에게 신문물을 전하고, 근대교육을 시켰습니다. 초기 대부분의 학교가 교회나 미션스쿨이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학도야 학도야 청년 학도야
벽상의 괘종을 들어보시오
한 소리 두 소리 가고 못 오니
인생의 백 면 가기 주마 같도다
멜로디는 스코틀랜드 민요 <석별 Auld Lang Syne>를 그대로 가져와 가사만 바꾸어 불렀습니다. 이 멜로디로 수많은 노래들이 만들어 집니다. 교회의 주일학교에서 성경 목록가도 동일한 멜로디를 사용합니다. 동일한 멜로디로 <철도 창가>가 있습니다. 사실은 당시 대부분의 노래가 이 멜로디를 사용합니다.